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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행전의 기도 기획특집
 
손정분

1. 서론

기도 없는 영적 생활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이 음부에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는 밤을 지새우거나 새벽에 습관을 좇아 기도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성취해 나가셨다.
마귀와 귀신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이 음부에서 그것들을 대적하여 이기고 더하여 마귀에게 속한 영혼들을 구원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하더라도 호흡하듯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농부가 결실을 바라고 밭에 씨를 뿌리듯이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기도의 소중함을 알려 주는 성경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있다. 물론 성경마다 기도에 대한 증거 본문들을 가지고 있다. 모세와 선지자들도 일찍이 기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하나님 이름의 명예를 걸고 기도했으며 이로써 체험한 크고 놀랍고 비밀한 일들을 간증했다. 사도들 또한 복음서를 통해서 기도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었고,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누가만큼 구체적으로 기도의 메시지를 남기지는 못했다. 누가는 그들보다 더 상세하게 기도에 대해서 서술했다.
누가가 얼마나 기도를 소중히 여겼는지는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4) 한 언급에서 엿볼 수 있다. 누가는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동등한 수준에 둔 사도들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우리에게도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기도와 병행해야 함을 암묵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책 누가-행전을 보면 예수와 제자들이 한결같이 기도하고 움직인다. 그들은 기도로 호흡했으며, 저축해둔 기도를 필요할 때마다 찾아 썼고, 뿌린 대로 열매를 거두었으며, 기도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았다. 말씀을 전하는 현장은 그야말로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현장이었다. 기도와 말씀이 충만한 현장마다 회개하고 거듭난 신자들이 줄을 이었으며,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고 확산되어 나갔다.
본고는 누가-행전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와 초대교회의 기도를 살펴보고 거기서 기도의 교훈을 배우고자 한다. 현대교회는 성경공부와 사경회와 제자사역 등으로 인해 말씀사역은 풍성한 반면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역은 거의 잠들어 있다. 항상 기도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한 축으로 본 누가의 기도관에 비추어 본다면 거의 절망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행전의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에 게으른 죄를 회개하게 하고, 모든 일의 최우선에 기도를 두게 해준다.


2. 누가복음의 기도

2.1. 기도에 대한 누가복음의 남다른 관심

기도에 관한 누가복음의 특별한 관심은 다른 두 권의 공관복음서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마태복음을 보자. 이 복음서는 누가복음과 함께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몇 개의 기도 본문을 가지고 있다. 즉 참된 기도와 헛된 기도(6:5-8), 두 세 사람의 합심기도의 효과(18:19), 믿고 구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의 절대성(21:22), 큰 환난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닥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권면(24:20)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기도를 살펴보면 6:5-8을 제외하고는 간접적으로 또는 다른 교훈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누가복음처럼 기도 자체가 주가 되어 거기에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마가복음에서도 기도하시는 예수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다.1) 하지만 기도에 대한 교훈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선 주기도문이 없으며, 기도의 비유도 두 개에 불과하다. 또 기도를 가르치는 본문에서도 기도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믿음, 용서, 외식에 대한 경고 등에 초점이 있다. 가령 11:24에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여 믿음이 부각된다. 또 11:25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여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 12:40은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한다.
이에 비하여 누가는 기도에 대해 많은 본문을 갖고 있으며, 기도 자체를 중요한 메시지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누가-행전에 나타난 기도와 관련된 어휘의 사용에서도 그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유상현의 연구에 의하면, 누가-행전은 무려 110번에 걸쳐 기도에 관한 표현이 나타난다. 그뿐 아니라 기도와 관련된 14개의 비유에서도 무려 7개의 비유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고 있는가 하면,2) 사도행전에서는 25개에 달하는 기도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기도에 대한 단어의 사용 빈도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누가는 기도에 관한 용어를 간구와 기도로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다.3) ‘간구’라는 뜻을 가진 명사 ‘데에시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4) 그리고 동사형인 ‘데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며, ‘요청하다, 간청하다, 구걸하다’의 의미로만 나온다. 그중에누가복음에서 8회, 사도행전에서 7회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또는 공관복음에서 기도와 관련된 용어는 누가의 문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누가의 기도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고 하겠다.

2.2. 예수의 기도

누가복음은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총 아홉 개의 예수의 기도 중에 두 개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타나고,5) 나머지 일곱 개는 누가복음에만 있다.6) 그 일곱 개에 해당하는 예수의 기도는 다음과 같다. ①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3:21), ② 열두 사도를 택하실 때(6:12), ③ 베드로의 고백과 인자의 죽음 예고를 하시기 직전에(9:18), ④ 변형산에 오르신 이유에서(9:28-29), 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11:1), ⑥ 예수를 부인할 베드로를 위하여(22:32), ⑦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23:34, 46)7)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예수께서 침례 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으나, 누가만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라고 하여 ‘기도’를 명시하고 있다. ② 또 열두 제자를 택하시는 사건이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만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를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하여 철야기도를 하시고 결정하신 일이었음을 밝힌다. 게다가 열두 제자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이어 베드로의 예수 인식 또한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등장하지만, 누가만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여,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과 수난 예고 직전에 예수의 기도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④ 변형산 사건에 대한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그 산에 올라가신 것이 곧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시고 가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누가는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일어난 일로 말하고 있다. 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기도하기 위해서였으며, 기도하실 때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⑤ 마태복음에서는 주기도문이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외식하는 기도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에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이 기도를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들려주신 것으로 소개한다. ⑥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기록하고, 그 예언대로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의 예언에 더하여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했다. 베드로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고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예수의 기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⑦ 예수의 최후의 칠언을 순서대로 하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내가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등이다. 여기서도 보듯이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없는 십자가상에서의 기도가 누가복음에는 세 구절이나 기록되어 있다.

2.3. 기도에 대한 가르침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가 하면, 자주 기도할 것을 격려하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비유를 베풀어주기도 하신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주기도문만한 것이 없다. 누가는 이 기도가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말한다. 주기도문은 교회를 위한 기도의 모범으로 주어졌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그러한 기도의 삶을 살다 가신 것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기동은 주기도문과 관련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자의 길을 가시는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8)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천국과 지옥으로 가를 수도 있는 절박한 사안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셨는가 하면(눅 18:1), 장차 세상에 임할 무서운 핍박과 환난을 능히 이기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눅 21:36). 또 환난이 닥칠 때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미리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2:46). 이 세상은 음부요 마귀가 세상 끝날까지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다하고 있으므로 기도하지 않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으며 믿음을 지킬 수 없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든 기도해야 하지만, 구원받은 자신의 영혼을 끝까지 보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이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도에 대한 비유 세 가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밤중에 찾아와서 강청하는 친구를 대하는 집주인의 비유(11:5-8), 과부의 강청을 들어준 불의한 재판관 비유(18:1-8),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18:9-14)이다.
먼저 밤중에 찾아와서 강청하는 친구에게 떡을 빌려주는 친구의 비유(11:5-8)에 대해서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귀찮게 졸라대는 친구에게 있지 않고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집주인에게 있다. 예수 당시 유대사회는 개인중심적인 서구사회와 달리 개인과 마을 공동체를 분리시키지 않았으며, 수치와 체면과 부끄러움을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으로 간주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최갑종에 의하면,9) 당시에는 한 가정의 결혼식, 장례식은 바로 마을 전체의 행사였으며, 한 가정에 찾아오는 방문객은 바로 마을 전체의 방문객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어느 한 가정에 손님이 찾아와서 환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마을 전체의 체면이 손상되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주인은 친구의 끈질긴 요청 때문에 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체면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서 빵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 비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여 끌려올 수밖에 없는 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는 우리의 아버지시고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맞다. 따라서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기도하는 방식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인데, 곧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11:9-13) 어떠하시겠느냐 하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기도 응답은 과부의 강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 비유는 예수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 이어서 베푸신 것으로서, 주께서 재림하실 날까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말고 기도에 힘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비유의 초점 역시 과부에게 있지 않고 과부의 강청을 들어준 재판관에게 있다. 재판과 소송을 굽게 하는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끈질기게 구하는 과부의 송사가 귀찮아서라도 들어주고 있으니, 하물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야 얼마나 더 자녀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요점 또한 앞의 비유에서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종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기도를 즐거이 들으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18:9-14)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종교적으로나 신분상으로 극과 극이라 할 만큼 서로 대조되는 상태에 있었다. 이들의 기도는 기도하는 자세에 있어서나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도 크게 달랐다. 우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의 정확한 의미를 최갑종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시켜 자신과 관련하여 기도하였다”10)라고 의역한다. 다시 말해서 그 바리새인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를 잘 듣고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자신을 그들과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관련하여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짧은 기도문 속에 일인칭 대명사인 ‘나’가 네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든다. 게다가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있다. 또 공개적으로 세리를 모독함으로써 이웃을 정죄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은 마치 가만히 앉아서 그의 자랑을 들어야만 하는 분과 같다.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대조가 된다. 바리새인은 성전 중앙에서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기도했으나 세리는 성전 모퉁이에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산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애통해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용서를 받는 것뿐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평가가 뒤따른다. 예수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손을 들어주셨다. 흠 없는 바리새인이 아닌 수치를 안고 사는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하셨다. 이것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그것이 복 받는 길이라고 생각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예수는 두 사람을 놓고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계셨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회개뿐이니, 바리새인이든 세리든 창녀든 회개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진리를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다.

2.4. 기도의 특징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예수는 기도하기 위해서 일정한 장소를 찾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 그는 요단강에서, 한적한 곳에서, 산에서, 평지에서, 십자가 상에서 등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이 필요할 때마다 기도하셨다. 이는 예수 자신이 참 성전이시므로 어디서나 아버지께 기도를 상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는 주로 홀로 기도하셨다. 어떤 사역을 하시던지 그 전후로 습관적으로 기도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는 ‘한적한 곳에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예수의 기도가 단독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는 그렇게 홀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아뢰고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해 아버지와 긴밀하게 상의하셨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5:19),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고 하여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계시가 기도할 때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기도는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 예수는 다양한 상황에서 기도하셨다. 곧 옛 신분을 장사 지내는 침례를 받으면서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기도하셨으며, 사역에 임하시기 전에 기도하심으로써 무수한 병자들을 고치고 이적을 보여줄 수 있으셨다. 또 장차 세계를 복음화할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는 철야기도를 하셨으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바치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도 기도하셨다.12) 변형산에서 예수의 변형도 기도하는 중에 일어났으며, 각처 각동으로 파송했던 칠십 인의 제자가 돌아와 승전보를 전했을 때도 성령으로 기뻐하며 기도하셨다. 이처럼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됨을 위해서,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시로 이루어졌다. 예수는 숨 쉬듯 기도하셨다. 이처럼 예수 이름을 모신 성전 된 자들은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들려주신 기도의 비유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일깨워준다. 곧 강청하는 친구의 요구를 들어주는 집주인의 비유나,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고야 마는 불의한 재판장 비유는 강청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강청을 들어주는 집주인과 재판장에게 있다. 즉 그들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도 바리새인이나 세리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회개를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 밖에도 누가복음의 기도는 찬양의 기도라는 점이 특징이다. 누가복음에서 찬양의 기도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는데, 기도자들은 침례 요한의 부친인 사가랴(눅 1:6, 67-80), 예수의 모친 마리아(눅 1:46-55), 안나의 기도(2:36-38) 등이다. 윌리엄 맥도날드의 연구에 의하면,13) 이들의 기도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경배를 드리며 끊임없는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깨끗하고 헌신된 삶을 위하여 금식과 예배와 같은 경건의 훈련으로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에 헌신하였다.


3. 사도행전의 기도

3.1. 누가복음과 연계된 기도

누가복음에서 보여준 예수의 기도와 기도의 비유가 사도행전에서 적용과 실천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 기도는 말씀 전하는 일과 동등한 수준에 있는 중요한 일이며, 성도의 호흡이요, 일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 직분자를 세우고, 기도를 하면서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며, 기도하면서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쳤다. 교회는 홀로 기도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에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1:14), 자주, 끈기 있게 기도하면서 많은 이적을 보았고, 많은 영혼을 예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3.1.1. 힘쓰는 기도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기도의 모습은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14)는 어구가 보여주듯이 힘쓰고 애쓰는 기도다. 여기서 “전혀 … 힘쓰다”의 헬라어 동사 ‘프로스카르테레오’()는 신약성경에서 열 번 등장하는데, 마가복음에 한 번, 사도행전에 여섯 번, 로마서에 두 번, 골로새서에 한 번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에서 ‘프로스카르테레오’의 용법은 일정하지 않은데, 10:7에서는 ‘수중에 있다’나 ‘충성하다’의 의미로, 8:13에서는 어떤 사람과 장기적으로 ‘함께 머물다’의 의미로 쓰였다.
그 밖에 네 구절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어떤 일을 굳게 계속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1:14는 오순절 전에 백이십 명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약속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굳은 결심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계속했음을 보여준다. 그 무리 속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도 속해 있었으니 이는 회개하고 기도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으며, 신약교회의 시초인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했다.
사도행전 2:42에서 오순절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여 침례를 받은 삼천 명의 제자들도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기도로 예루살렘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어 2:46에서도 오순절 직후 그들은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6:4에 의하면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임을 깨달았다.14)

3.1.2. 항상 하는 기도
사도행전의 기도에서 두 번째로 인상적인 장면은 ‘항상’ 하는 기도다.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4) 하며 기도를 일이요 주님과 항시 교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생각했다. 바울의 회심과 전도여행을 통해서도 범사에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다메섹에서 주를 만난 후 빛으로 인해 눈이 멀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빛을 보고 성령충만을 받았다(9:11-17). 이후 이방인의 사도로서 선교를 나갈 때면 새로운 지역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도였다(16:13). 그는 날마다 기도했는가 하면 기도처를 향하여 발길을 옮기기도 했다(16:16). 그러다가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기도 했고(16:14),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 귀신을 쫓아주기도 했다. 이처럼 몸에 배인 습관처럼 항상 하는 그들의 기도는 감옥에서도 멈추지 않았다(16:25). 장로들과 모임을 마친 후에도 무릎을 꿇고 합심기도를 했고(20:36), 바닷가에서도 성도들과 헤어질 때 무릎을 꿇어 기도하며 장차 일어날 일을 주께 맡기며 기도했다(21:5).
항상 하는 기도는 사도나 교인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고넬료도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던 자였다. 그의 경건한 삶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 보답으로 그는 큰 사도인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유대교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모시고 침례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항상 하는 기도가 그에게 큰 영광을 보게 해준 것이다(10:2, 4, 9, 30, 31).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은 사도행전의 기도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이 모일 때 실천했던 교회의 정규적인 활동으로 보았다.15)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이나(3:1),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미하고 기도한 것은(16:25)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기도한 것도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될만한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기도가 아니라 교회의 정규적인 기도를 보다 강화한 것이었다고 한다(12:5).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했으며,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능한 일들을 통하여 일하셨다고 한다(4:31; 9:40; 28:8).

3.1.3. 직분자를 세우는 기도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또 하나의 기도 장면은 직분자를 세울 때다. 예수도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밤이 도록 기도하셨다고 하신 것을 보면,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충원할 때의 일이다(1:14). 이 일은 성령 강림이 있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모인 무리들은 모두 헌신적으로 기도에 몰입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백이십 명 중에서 사도의 조건에 부합하는 두 사람이 추천되었고, 합심기도 후 제비를 뽑아서 맛디아를 얻었다.
두 번째 사례는 식탁 봉사를 하며 구제의 일을 담당할 일곱 명을 선택한 후에 행한 기도다(6:6). 그 일곱 명은 회중들에 의해 선택된 자들로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이 선택되자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직분을 위임했다.
그 다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택함을 받은 때에도 아나니아의 안수와 기도가 있었다(9:10-17). 아나니아의 안수와 기도 후 그는 즉시 각 회당으로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이후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지역으로 파송 받아 나갈 때도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하던 중 주의 명령을 듣고 금식하고 기도한 후 두 사람에게 안수해서 보냈다(13:1-3). 바울 또한 자신이 선교를 하면서 세운 교회마다 장로들을 택해야 했는데 이 일에도 금식 기도가 병행되었다(14:23).

3.1.4. 부르짖는 기도
도움이 절실하고 간절해지면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짖게 된다. 목숨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묵상기도를 하거나 중얼거리는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후 큰 핍박과 환난 가운데 처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 예수교회는 유일신 사상을 가진 유대주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유대주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증거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제자들이야말로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바울이 그랬듯이 유대주의자들은 예수교회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 여겼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말씀을 전하려면 더욱 기도에 힘써야 했다.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갔다가 풀려나고, 스데반이 죽고, 베드로와 요한마저 옥에 갇히기까지 하자 교회는 이전처럼 마음을 합하여 부르짖기 시작했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4:24).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으로 예수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영혼이 떠나기 전 스데반은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자기의 영혼을 의탁했고,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기도했다(7:59-60). 여기서 ‘부르짖다’의 동사형인 ‘에피칼레오마이’()는 ‘부르다,’ ‘호소하다’로 사용된다. 또 이와 유사하게 쓰인 부사 ‘간절히’(엑테네스, )는 ‘뜨겁게,’ ‘열렬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예루살렘교회는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12:5). 기도의 응답으로 베드로가 풀려나서 마리아의 집에 갔을 때도 그들은 한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다(12:12). 이렇게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와 성도들은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었다.

3.2. 기도의 특징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는 사도행전에서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유상현에 의하면 사도행전의 기도는 ‘구속사의 결정적 순간들’과 대단히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가령 열두 사도의 충원(1:14), 오순절과 예루살렘 교회의 성립(2:42), 일곱 지도자의 선출(6:3-6), 사마리아 지역 선교(8:14-25), 그리고 베드로의 고넬료 집안 전도(10:30-48) 등 구속사의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기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16)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순간부터 마지막 십자가 도상에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예수께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간절하고 오랜 시간 기도하셨던 것처럼, 사도행전에는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의 투옥과 석방, 다른 선교지로의 이동이 그러하며, 바울의 놀라운 회심 체험과 사역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그들과 함께 하셨다. 가령 바울의 회심을 돕기 위해 아나니아의 기도가 있었고(9:10-18), 빌립보 감옥에서의 석방과 간수 일가족의 구원을 위하는 일에도 기도가 있었다(16:25).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으니 밀레도나 두로 해안에서도 기도했으며(20:36; 21:5), 기도하면서 주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로마로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위태롭게 되었을 때도(27:35), 멜리데에서 신유를 행하고 대접을 받게 된 데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28:8).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기도 또한 성전과 관련되어 있었다. 다만 그 성전이 가시적인 성전에서 비가시적인 성전으로 옮겨졌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신 후 성전은 예수의 몸으로 또 예수 이름을 모신 성도의 영혼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가시적인 성전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예수께서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고 하셨듯이 기도는 구별된 장소를 벗어나서 어디서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기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초기의 교인들은 다락방에서(1:13), 고넬료의 집에서(10:30),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12:12), 성문 밖 강가에서(16:13, 16), 바닷가에서(21:5), 선박 위에서(27:35), 섬에서(28:8) 기도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유상현은 가시적 건물인 성전 속 지성소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는 곳이면 어디라도 지성소가 된다고 하면서 “그때까지 특정 장소, 즉 성전을 지향하던 유대 전통의 구심적 귀환운동이, 성령의 임재를 통한 기독교적 원심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이다”17)라고 하여, 기도를 통하여 율법시대와 성령시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전도와 치유사역을 위해 먼저 기도하셨던 것처럼, 사도행전에서도 이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에는 반드시 기도가 선행되거나 동반됨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하는 행위다. 따라서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다. 누가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로 소개한 성령을 받기 위해서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이에 따라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했다. 사마리아 교회와 에베소 교회도 성령 받기를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8:15; 19:6).
그 외에도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죽은 다비다를 살렸고(9:40), 바울은 빌립보에서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서 귀신을 쫓았으며(16:18), 멜리데 섬 추장의 부친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여 열병과 이질을 고쳤다(28:8). 이외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예수 이름으로 일으킨 일이나,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일도 평소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30) 하고 기도한 데 따른 응답으로 보아야 한다.18)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통해 기도하며 이루신 역사들이 제자들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 뿐 아니라 물리적인 장소가 진동하는 일도 있었으니, 핍박을 앞둔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마치자 그 응답으로 모인 곳이 진동하기도 했다(4:31). 이와 유사하게 기도의 응답으로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린 경우도 있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지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한 결과 옥터가 흔들리고 지진이 나서 그들이 풀려났을 뿐 아니라 간수장의 일가족을 구원하는 열매까지 얻게 되었다(16:25-26, 30-34). 이러한 표적을 두고 김기동은 ‘기도는 자신을 곤경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세상에 살면서 병, 가난, 온갖 억압, 고민과 번민 등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에 힘쓴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말한다.19)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개인기도와 합심기도가 균형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개인기도는 성도 개개인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방법이다. 스데반(7:59 이하), 바울(9:11), 고넬료(10:4), 베드로(10:9)와 같은 이들의 개인기도는 그들 자신을 견고케 했을 뿐 아니라, 교회까지 유익을 주는 기도였다. 또한 합심기도는 성령충만을 가져왔고 사도들을 위기에서 건져주었으며, 교회의 부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하신 말씀대로, 자신뿐 아니라 서로를 굳게 세워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서 합심하여 기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결론

누가-행전에서 성도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요, 기도하는 자를 의미한다(행 9:14, 21).20) 이 땅의 첫 예수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날마다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고 가정교회로 모였다. 그들의 기도는 힘이 있어서 예수 이름을 선포하면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죽은 자도 살아나고 땅도 진동을 하고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도 움직이고 귀신조차 스스로 자기의 정체를 밝히며 떠나버릴 정도였다. 이러한 기도의 힘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며, 오늘 우리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지금도 우리는 초대교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물론 교리주의자들은 성령의 임하심과 은사는 사도시대로 종료되었다고 말하나, 성령의 역사가 지금도 지속된다고 믿는 자들은 초대교회의 이적들이 오늘 교회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그래서 갑자기 끝나버린 사도행전의 28장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29장부터 우리가 계속 써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가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핍박과 희생이 따르는 선교의 현장에서는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서 놀라운 이적이 속출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이적처럼 굶주린 자들에게 식량이 제공되는 이적도 있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도 있고, 축지법과 같은 장소 이동의 이적도 있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이적들이 충분히 일어나고 있다.
과거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에는 그런대로 이적이 있었다. 어느 기도원 어느 교회 하면 사도행전적인 이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현장이나 소문을 듣기가 쉽지 않다. 치료의 강물, 이적의 강물이 넘실대는 현장을 찾기 어렵다. 상처받은 영혼들과 병자가 넘쳐나도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할 힘이 없다. 설교는 넘쳐나는데 따르는 표적이 없다. 왜 그런가?
누가-행전의 시대나 지금이나 교회는 기도와 말씀으로 보존되고 성장한다. 예수의 일은 기도하고 희생하는 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가-행전의 기도가 보여주듯이 교회성장에는 반드시 기도가 담보되어야 한다. 개인의 영적 성장에도 기도가 필수다. 우리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라고 하신 예수의 염려를 무시하지 말고 믿음의 기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죄 용서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생명에 속한 것과 사망에 속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좁은 문 협착한 길을 찬송하며 가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다음은 기도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기도의 힘으로 온갖 핍박을 이기고 환언운동을 이끌어 온 김기동의 기도에 대한 확신이다. 이것으로 본고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기도는 신자에게만 제한된 하나님의 약속이요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라고 하는 절대수단에 의해서만 인간을 도우시고, 인간은 기도라고 하는 절대 진리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기를 상달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터널이요, 하나님이 인간의 소리를 들으시는 터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수천 년 전에 약속되어져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인간이 계속해서 교통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실을 이해하고 진리를 순종하려고 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려고 하는 자들의 통로요 방법입니다.21)





1) 1:35; 6:41, 46; 7:34; 8:6; 14:22, 32-39; 15:34.
2) 14개의 기도 관련 비유 중 2개만이 공관복음서 모두에 등장하고, 마태에만 있는 것은 1개, 마가에만 있는 것은 2개, 요한에만 있는 것은 2개다. 유상현, 『사도행전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13-4.
3) 김득중, 『누가의 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1991), 266-8.
4) 눅 1:13; 2:37; 5:33, 행 1:14, 롬 10:1, 고후 1:11; 9:14, 엡 6:18, 빌 1:4, 19; 4:6, 딤전 2:1; 5:5, 딤후 1:3, 히 5:7, 약 5:16, 벧전 3:12. 그중 에베소서 6:18과 빌립보서 1:4는 2회 사용되었다.
5) 예수의 감사기도(마 11:25-27, 눅 10:21-22),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눅 22:39-46).
6)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은 마태복음에서 3회, 마가복음에서 5회, 요한복음에서 2회 나오고, 누가복음에서는 9회 나온다.
7) 예수의 최후 칠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하라. 김기동, 『최후의 칠언』 (서울: 베뢰아, 2009).
8)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김기동, 『주기도문』 (서울: 베뢰아, 199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서울: 베뢰아, 1996);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 (서울: 베뢰아, 2009).
9)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서울: 이레서원, 2001), 261-74.
10)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279-84.
11) 누가복음의 기도의 서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등장한다.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할 때 백성들은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으며(1:10), 그때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하나님께 들렸다’고 하면서 요한의 탄생을 알려주었다(1:13). 또 여선지자 안나도 84년 동안 성전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다(2:37). 예수도 예루살렘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를 내려주셨다(19:46). 또 사도들도 초기에는 유대인의 습관을 좇아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12) 누가복음의 기도는 구속사적인 사건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곧 그리스도의 탄생(1:30-35, 46-55), 침례 요한으로부터의 침례(3:21-22), 변형산 사건(9:28-36), 그리스도의 승천(24:44-51) 등이 그것이다.
13) William Mcdonald, 『누가복음』, 정병은 역 (서울: 전도출판사, 1997), 44.
14)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눅 22:44) 기도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프로스카르테레오’와 다른 단어가 쓰였다. ‘애써’로 번역된 ‘게노메노스’()는 ‘생겨나다,’ ‘되다,’ ‘발생하다’를 의미하며, ‘힘쓰고’의 ‘아고니아’()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서 한 번 사용되었는데, 절박한 결단이나 재난을 직면하여 ‘힘의 최고의 집중’을 가리킨다. 그리고 ‘더욱 간절히’의 ‘에크테네스테론’()은 ‘더욱 열심히,’ ‘더욱 강렬하게’의 의미를 가진 비교급이다.
15) I. Howard Marshall, 『누가행전』, 이한수 역 (서울: 엠마오, 1993), 308-9.
16) 유상현, 『사도행전 연구』, 117.
17) 유상현, 『사도행전 연구』, 212.
18) 사도행전에는 일곱 개의 치유기사가 나온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일(3:1-11),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고(9:34), 죽은 다비다를 살려낸 일(9:38). 그리고 바울이 베드로와 유사하게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14:9-10),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쳤으며(16:18), 죽은 유두고를 살리고(20:9-10), 멜리데의 추장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친 일(28:8) 등이다. 윤철원은 사도행전의 치유기사는 복음전도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윤철원, 『사도행전의 내러티브 해석』 (인천: 바울, 2004), 236.
19) 김기동, 『믿음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서울: 베뢰아, 2001), 168-72.
20)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예수 이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에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손정분, “하나님의 이름과 기도,” 『한국신학』 39 (2008), 25-26.
21) 김기동, 『믿음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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