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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의 구약해석과 권면 메시지 기획특집
 
김민정

야고보서의 구약해석과 권면 메시지


김민정


1. 들어가는 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사도들의 권면은 시대를 초월하여 성도의 믿음과 삶을 향해 책망하고 격려한다. 현대교회는 지성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에 머무른 신앙이 삶을 움직이지 못하여 서로 이원화되어 가고, 물질만능주의의 영향으로 성도들의 삶이 신령한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데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변하지 않는 믿음의 본질과 신령한 자의 삶의 현장에 관한 보석 같은 권면 메시지를 전하는 야고보서가 오늘날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일찍부터 홀대를 받아왔고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야고보서 저자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정경성을 환영받지 못한 것과 종교개혁 당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와 마찰을 일으킨다고 오해를 받은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의 야고보서에 관한 평가인 ‘지푸라기 서신’(ein recht strohern Epistel)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에 따라 바울과 야고보를 서로 반(反, antithesis)의 입장에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변증법적으로 연구한 것은 오늘날 문제로 지적된다. 신앙적, 신학적 영역에서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고 권위를 잃은 서신서는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나 이해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한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영접한 성도의 믿음에 대한 성령의 증거로서 자기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던 주의 형제 야고보가 기록한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으로서 본서는 그에 맞는 영적 권위와 유익을 담고 있는 소중한 말씀이다. 그러나 흔히 야고보서를 일관된 구조와 주제 없이 잠언 형식의 짧은 권면이 모여 있다고 보기 때문에,1) 저자 야고보의 신학이나 본서 메시지의 짜임새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메시지를 제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독교 윤리나 기독교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저자가 지시하는 궁극적인 방향과 관심사를 놓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야고보서 메시지에 관한 재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여러 가지 접근방법과 연구범위가 가능하겠지만, 야고보서의 특징 중 하나인 구약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2) 야고보서는 그 수신인부터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고 표현되어 본서신의 저자와 수신자가 구약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당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계 기독교인에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의 정체성은 광야교회를 이어가는 영적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있다 하겠다.
아울러 메시지가 선포되는 대상으로서 인간에 관한 이해는 창세기 원역사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메시지의 중심 주제로서 믿음과 행함은 구약의 율법과 구약적 인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설명된다. 삶의 현장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 권면은 첫 언약의 맥락에서 주어진 사랑을 근본으로 한다. 그리고 구약의 선진들을 모델로 하여 신령한 삶의 변함없는 원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모든 메시지는 구약에 관한 저자의 해석을 토대로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울려 퍼지는 것으로서, 권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겠다. 이에 야고보서의 구약해석과 그에 따른 권면 메시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추구하는 신앙과 삶의 조화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이는 야고보서의 메시지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야고보의 영감으로 본서를 이해하고자 함이다.


2. 권면이 전제하는 인간론

신약의 잠언이라 불릴 만큼 간결한 명령형 문체를 통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권면의 말씀으로 볼 때, 먼저 그것이 어떠한 자들을 향한 권면이냐를 살펴보아야 한다. 야고보서가 전제하는 인간 이해는 본 서신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2.1.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두 마음을 품은 자

야고보서가 전제하는 인간 이해는 창세기 원역사에 기록된 선악과 사건의 경위와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첫 번째 살인자가 된 가인의 내적 갈등상태를 반영한다. 본 서신은 처음부터 시험과 시련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인내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외부적 원인이 아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다. 욕심은 죄를, 죄는 사망을 낳는다(1:14-15).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이 독한 시기와 다툼뿐이다(3:14).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인죄론(hamartio-anthropology)을 반영한다.3) 바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서(롬 5:12), 창세기 3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뱀의 꾐에 빠진 여자는 선악과 금령에 대한 말씀을 거부하고 육체의 욕심에 이끌려 범죄에 이르게 되었다. 선악과를 바라볼 때 그것이 보암직했다고 하는 표현을 원어로 보면 ‘타아바-후 라에나임’()으로, ‘그것이 보기에 탐나는 것이다’라는 의미다. 이때 사용된 ‘타아바’()는 보통 ‘원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경우 ‘욕심, 탐욕, 탐하는 것’(시 106:14, 민 11:4, 잠 21:26)을 가리킨다. 야고보가 죄를 짓게 되는 인간의 내적 원인으로 욕심을 지적한 것은 적절하다 하겠다.
일단 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는 죄의 소원이 자리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살인으로 드러났다(창 4:7-8). 야고보서에서 이것은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표현되었고, 다시 한 번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고 말한다(4:2). 인간이 처음부터 잘못 받아들인 뱀의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이다(3:15).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마귀에게서 온 것으로 인간의 정욕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것과 다른 지혜가 있으니 세상이 아닌 위로부터 난 지혜로서 성결하고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3:17).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이 이원론적으로 대조됨을 볼 수 있다.4) 인간은 그 두 지혜 사이에 끼여 있으며 선택의 길에 서 있는 존재다.5)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선 자요 두 마음을 품은 자다(1:8; 4:8).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16)고 경계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1:5)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야고보서의 메시지가 인간의 본질적 타락성과 하늘과 땅으로 대별되는 의와 불의의 이원론적 세계를 염두에 두고 전달된 것임을 보여준다.

2.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첫 열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어디에 속한 자인가? 야고보서가 전제하는 두 번째 인간 이해는 구약시대의 인간과 전적인 단절을 선언하며, 동시에 언약의 성취를 맛본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첫 열매로 표현된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라고 말씀할 때, 첫 열매를 가리키는 ‘아파르케’()는 구약 신학적 배경을 반영한다. 이스라엘의 구속역사는 장자의 죽음과 장자의 구속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건이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내 아들이요 첫 태생 즉 장자다’라고 하신 자들이지만(출 4:22),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거스르는 바로를 향해서는 ‘네 아들 네 첫 태생을 죽이리라’ 말씀하셨다(출 4:23).
장자로 번역된 ‘베코르’()는 사람과 짐승을 포함하여 처음 난 것, 첫 열매를 의미한다. 출애굽 사건은 ‘베코르’ 즉 첫 태생인 장자의 구속과 죽음이 교차된 것이다. 하나님의 장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바로의 첫 태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집트 모든 짐승의 첫 태생은 죽임을 당했다(출 12:29). 이렇게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짐승의 첫 새끼는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쳤고, 아들 가운데 장남은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는 것으로 속했다(출 13:2, 5). 구약에서 구속받은 장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야고보는 우리가 그 첫 열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장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은유는 계시록에서 다시 한 번 발견된다(계 14:4).6)
첫 열매로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라고 할 때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형은 ‘아포큐에오’()로 오직 야고보서에서만 두 번 사용된 단어다(1:15, 18). 일반적으로 아이를 낳다(begot, bear, cause)라는 말을 할 때 쓰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겐나오’()다(마 1:2, 20, 눅 1:13, 35, 요 8:41; 9:34, 행 2:8; 7:8, 29, 고전 4:15, 빌 10:1, 딤후 2:23 등). 그리고 종종 ‘티크토’()가 쓰인다(마 1:21, 눅 2:6, 11, 요 15:21, 갈 4:27 등). 야고보서 외에 다른 신약에서 거듭남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것도 ‘겐나오’다. 요한복음은 ‘겐네데 아노덴’() 곧 ‘위로부터 나다’라고 표현했고(요 3:3) 베드로서는 ‘아나겐네사스’() 곧 ‘다시 나다’의 의미를 사용했다(벧전 1:3).7) 야고보는 진리로 낳음을 말하기 위해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욕심이 낳고 죄가 낳는다고 하는 표현으로 동시에 사용했다. 낳는 행위를 동일한 원리, 즉 열매와 결과로서 이해하면서 무엇으로 낳았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것인지 이 세상의 욕심으로 낳은 것인지가 중요하다.8) 학자들 간에 이 진리의 말씀에 관한 견해가 대립되고 있지만,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로 말미암은 율법이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진리는 새 언약으로서 전혀 구분된다(요 1:17).9) 진리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요 1:1-18, 벧전 1:23). 그러므로 거듭남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성령의 역사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일지라도 신자의 본질적인 처소는 위로 하늘이며, 그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다. 이와 같이 야고보서는 이미 거듭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자를 향해 주어진 권면이다. 다시 말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듭난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되 ‘이미와 아직(already - not yet)’의 종말론적 긴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10)


3. 권면의 중심주제로 본 믿음과 행함

믿음과 행함에 관한 주제는 야고보서 연구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부분이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의롭게 됨의 유일한 전제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이신칭의와 상반되는 가르침과 주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믿음 외에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느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바울의 복음 전파와 또 다른 시점과 수준을 향해 있다. 후대 학자들에 의해 사이가 갈라진 것이지 성경대로 보면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아무런 신앙적, 신학적 갈등이 없다.11) 야고보와 바울이 증거하는 믿음은 반목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과 행함은 어떠한 것인가?12) 구약의 율법에 대한 야고보서의 이해와 믿음의 예시로 세운 두 명의 구약 인물을 통해, 믿음에 관한 야고보서의 구약해석과 메시지를 살펴보자.

3.1. 율법 이해에 관한 오해와 실상

야고보서에서 율법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으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있다(1:25).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죄의 권능인데 이것이 자유를 준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롬 3:20, 고전 15:56).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육체의 예법으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이 지닌 능력이 아니다. 도리어 이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관계되어 있다. 즉, 영생을 얻도록 거듭나게 하는 ‘진리의 말씀’(1:21)과 같이 자유는 죄의 종이 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인 구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함과 같다(갈 5:1).13) 이렇게 볼 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1:25),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행하라(2:12)는 말씀은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율법을 지키되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이지 십계명을 토대로 한 율법을 준수하여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하는 말로(3:2) 육체의 한계를 인정한 것처럼, 행동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믿음보다 우선하지 않는다.14)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라는 말씀에서도, ‘디카이오우타이’()는 ‘의롭게 하다’(justify)를 의미하는 동사의 수동형이면서 현재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칭의는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는 칭의라기 보다는 믿음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열매를 말한다.15)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4-5)라고 말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을 바울의 말로 이해한다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갈 5:6).
더 정확하게 실상을 말한다면, 믿음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다. 믿는다면 그에 따라 순종하게 되어 있다.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 위에 행위라는 또 다른 의를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은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과 그에 따라 몸이 순종하는 것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17) 야고보는 구약의 두 인물을 통해 적절하게 이를 강조한다. 하나는 믿음의 조상이요 기준이 되는 아브라함이요, 다른 하나는 유대인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방인 창녀 라합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신분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은 동일하다.

3.2. 믿음에 관한 구약의 두 모델

믿음과 행함의 모범으로 제시된 인물은 당연히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 역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을 가르쳤는데, 같은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증거의 말씀은 서로 다른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창세기 15:6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롬 4:3-6). 그러나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창세기 22장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2:21-23). 의롭다 함이 믿음으로 말미암는지 행함으로 말미암는지 표면적으로는 서로 모순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의롭게 되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면, 야고보의 관심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온전히 응하여진 시점에 있다.
말씀이 응하였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는 ‘채우다,’ ‘완성하다’(fill, make full, complete)를 의미하는 ‘플레로’()다. 이것은 의미상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할 때 사용된 ‘텔레이오’()와 상통한다(2:22). ‘텔레이오’ 역시 ‘완성하다,’ ‘마치다,’ ‘목표를 달성하다’(complete, finish, bring to its goal)를 의미한다. 이로 보건대, 믿음은 행함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게 되고 완성에 도달한다.18)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게 된다.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수준이 어떠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2:23).19) 다시 한 번 야고보서의 믿음이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그 믿음을 따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믿음으로 순종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20) 행함이 있을 때에 그 시작한 믿음이 온전케 된다(2:22).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향해 가진 라합의 믿음과 행동은 일치했다. 그녀는 아브라함과 같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듣고 이를 믿었다.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홍해를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저편에 있는 두 왕을 전멸시킨 일을 듣고 가나안 땅마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이 라합의 믿음이었다(수 2:8-10). 그리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수 2:11). 그녀의 믿음이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라합은 조국을 배신하는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정탐꾼을 숨겨줄 수 있었다.21) 믿음의 행위는 그 정도가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는 순종이다. 믿음과 행위는 나뉘는 것이 아니다.


4. 실천적 권면 메시지

야고보서는 간결한 명령형 문장의 빈번한 사용이 말해주듯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권면을 담고 있다. 실천적 권면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믿음으로 행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명령으로서 사랑에 관한 권면인데, 이는 첫 언약과의 연결선상에 있다. 다른 하나는 야고보서의 인간론이 말해주듯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인간이 육으로 사는 동안 어떻게 신령한 삶을 영위하는 믿음의 수준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권면이다. 이는 동일하게 육을 가지고 신령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구약의 인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4.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강령인 사랑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게 된 구체적인 정황은 공동체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8). 사랑해야 할 이웃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가난한 자를 언급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구약적 배경과 기록 당시의 배경을 동시에 보여준다(2:2-6). 레이드(M. Reid)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1:2-25의 수신인이 상인들이라고 주장한다. ‘오늘과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는 언급(4:13)은 팔레스틴의 상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1:8에 언급된 ‘호도이스’()나 1:11의 ‘포레이아이스’()는 둘 다 ‘일,’ ‘행사’로 번역되었지만, 실제로는 상인들의 행로인 ‘여행 길’(way, road, journey)을 가리킨다.22) 팔레스틴의 상인들은 로마제국과 인도, 중국 사이의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중계무역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팔레스틴 유대인들은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쪽은 무시와 핍박 그리고 억압당함 다른 한 쪽은 시기의 대상으로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23)
구약의 첫 언약도 이웃 사랑을 말할 때,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다.24) 구약에서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친히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허락된 것이었으므로 경제적인 평등을 지향했다. 더욱이 신명기 법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보호법의 특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특정인이 지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매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도리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계급사회가 되면서 빈부가 발생하게 된 것을 신랄하게 비난했다.25) 율법의 구체적인 규례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곡물을 벨 때나 열매를 딸 때에 남겨두는 것은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한 배려였다. 이웃의 재산에 대한 압제나 늑탈, 품꾼의 삯을 미루는 것은 분명한 죄로 다스려졌다. 귀먹은 자나 소경과 같은 이들 역시 이웃으로서 고려하라는 조항을 발견할 수 있다. 재판 시에는 공의로 해야 하며, 타인을 논단하거나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공의를 추구하며 이웃에 대해 존엄히 여기고 배려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명령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레 19:10-18).
예수는 새 계명을 준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요 13:34). 이에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은 곧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요 이미 들은 말씀이라고 했다(요일 2:7-8, 요이 1:5). 야고보 역시 첫 언약의 연속선상에서 사랑의 명령을 받아들이되 새 언약으로서 믿음 안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2:16-17). 야고보서에서 이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이기 전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다(3:9).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향한 사랑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김기동은 이웃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신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 14:21).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되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26)

4.2. 신령한 삶을 위한 지침

영혼에 믿음을 가진 거룩한 성도가 육을 가지고서 어떻게 믿음의 삶을 지속하면서 성장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모두 동일한 과제다. 이에 야고보는 구약의 인물들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믿음으로 하늘을 향해 사는 신령한 자의 삶을 위한 권면을 제시한다. 그것은 겸손하라, 인내하라, 기도하라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27)

4.2.1. 겸손하라
야고보는 인내와 기도를 말하면서 구약의 인물을 언급하는 것과 달리, 겸손에 관해서는 제시된 인물이 없고 도리어 겸손의 반대편에 있는 교만한 자 마귀의 예를 통해 경고한다. 믿음의 선진 중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인 인물들은 손꼽을 수 있다 할지라도 모델로 제시될 자는 없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그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 진실이다(마 11:29; 21:5, 빌 2:6-7).
야고보는 도리어 겸손하기 위해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한다(4:6-7). 마귀는 피조물로서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겠다고 나선 자다(사 14:12-15). 여기서 ‘비기겠다’는 것은 원문상으로 ‘~와 같다’는 뜻을 지닌 동사의 1인칭 미완료 형태인 ‘에다메’()다. 즉, 자기가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바로 그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너희도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라고 유혹한 자다. 성경은 마귀의 불의가 바로 교만함이라고 고발한다(겔 28:17).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시다(4:6).
겸손에 대한 권면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문제로 연결된다(4:11-12). 학자들은 이 단락이 사회학적 측면에서 공동체 유지를 목적으로 한 목회적 권면이라고 말한다.28) 험담이 공동체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이와 같은 지적은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 하는 잠언의 가르침과 같다. 그런데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비방은 교만한 상태에서 나오는 하나의 열매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바로 교만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교만과 비방의 관계에 대한 존슨(L.T. Johnson)의 설명은 적절하다.

비방이란 이웃을 낮추고 나를 높이는 이중적 기능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지위를 빼앗아 자기가 가지려는 것이다. 이는 생존경쟁의 완벽한 예다. 그러므로 비방이란 다른 사람을 파괴시키고 자신을 내세우려는 교만의 한 형태다.29)

이러한 교만은 마치 자기가 판단의 기준 즉 율법의 재판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능히 살리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입법자요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선언하면서, 도대체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을 행하느냐고 강력하게 징계한다(4:12).
비방과 판단에 이어 교만의 두 번째 양상은 허탄한 자랑이다(4:13-17).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 안개같이 쉽게 사라지는 생명을 가진 자가 자기 신념을 따라 내일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이다.30) 거기에는 주의 뜻도 없으며 창조주요 주되신 이를 기억함도 없다. 도리어 주의 뜻 안에서 우리가 살고 이것저것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하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교만에서 나오는 허탄한 자랑을 악하다고 말한다. 교만은 믿음에 있어 가장 큰 적이며, 마귀에게 속은 인간의 뿌리에 자리한 옛 사람의 모습이다. 야고보는 이를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4.2.2. 인내하라
두 번째로 믿음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인내다. 그것은 야고보서의 처음부터 언급된 여러 가지 시련과 관계된 것이다. 인내를 가르침에 있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언급한 것은 유용하다. 이는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에게 자기 능력 밖의 일로, 인내하는 것만이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인내는 평안 중에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언급하는 대로 원망이 나오고 고난이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고난의 상황에 인내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인내에 대한 단락이 부한 자들을 향한 징계의 말씀(5:1-6)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적용은 보다 광범위하며, 경제라는 실질보다는 의인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에 가까운 문제다. 이는 인내의 모범으로 제시된 인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는 구약 역사 전반에 걸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역사 그리고 이를 거부한 인간으로 인한 고난을 함축한 말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는 기본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그의 권위로 그의 말을 전하는 자다(단 9:6).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방자하게 이용하든지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다(신 18:20-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셨고, 그를 상하지 말라고 하셨다(렘 7:25, 시 105:15).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향한 핍박은 선지자가 주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예수도 이를 지적하셨다(애 2:20, 마 23:37).31)
선지자를 본으로 삼아 인내하라는 야고보의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마 5:12). 성도가 선지자와 동일한 입장에서 핍박 가운데 인내하는 것이 합당한 자세임은 계시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마지막 때에 성도와 선지자의 피를 취한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계 16:6; 18:24). 하늘의 성도, 사도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원해주심을 기다리는 동지로서 즐거워할 자들이다(계 18:20).32) 야고보 역시 심판자의 임박한 도래를 통해 인내를 촉구한다. 인내는 맹목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때가 있어 의와 불의가 드러날 것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견딤이다.
두 번째로 욥의 인내가 제시되는데, 구약에서 의인의 고난이라는 어려운 고민을 던져주는 욥은 고난과 인내의 표본이다.33) 욥의 경우는 그가 인내를 통해 얻은 결말을 주목하라고 제시된 인물이다. 욥기 13:15 원문에 따르면, 욥은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요동하지 않고 그를 향해 기다리며(아야헬, ) 자신이 가는 길을 확정하겠다(오키아흐, )고 말했다.34)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애매히 고난을 당해야 했던 욥의 삶은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라는 결말을 통해 모든 눈물을 씻기에 충분하다(욥 42:12).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길은 핍박이 있고 인내가 필요하며 하나님의 위로와 복이 기다리고 있다.

4.2.3. 기도하라
기도는 야고보가 특별히 주목하고 실천한 신앙생활의 요소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늘의 것을 구하는 것이며(1:5, 17), 그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1:6-8). 기도와 함께 찬양은 성도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반응으로서 매우 자연스럽고 언제나 따르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삶에 고난이 있으면 기도할 수 있고, 즐거움이 따르면 찬양하는 것이다(5:13). 기도의 능력은 실제적이다.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는데(5:14-16), 여기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이와 같이 의인의 기도가 지니는 힘에 대한 개념은 구약에서 낯설지 않다. 의인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중보하는 자가 되는데,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역할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창 19:22). 잠언의 지혜는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한다(잠 15:29). 신령한 믿음의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육체를 통해 감당하고 지속시켜야 하는 마지막 요소로서 기도는 역사하는 힘,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구약의 인물은 영감의 선지자로 대표되는 기도의 사람, 엘리야다(5:17).35) 야고보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엘리야를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사용된 원어 ‘호모이오파데스’()는 ‘특성이 같음,’ ‘본질이 같음’(with the same nature)을 뜻하는 단어다. 이는 야고보서 외에 사도행전에서 한 번 더 등장한다. 앉은뱅이를 고친 것을 보고 놀란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을 때, 두 사도가 이를 말리기 위해서 옷을 찢고 외친 소리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8-15). 즉, 영이나 신이 아닌 육체에 속한 인간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 역시 땅에 속한 육신에 매여 있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의 기도는 하늘의 구름을 막기도 하고, 또한 구름을 찢어 비를 쏟아놓게 하는 역사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아합 왕 때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이세벨을 통해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왕상 16:33). 그 결과 삼년이 넘게 가뭄이 오게 되었고, 이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때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구하되 일곱 번까지 했다(왕상 17:42-44).36) 엘리야의 믿음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지속되어 행해졌다는 것을 통해서 보여진다.37)
역사하는 힘이 있는 엘리야의 기도가 의미하는 것은 그의 영감이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그의 영감의 갑절을 얻고자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첩경을 예비한 마지막 선지자 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영감으로 사역한 자다(왕하 2:9-15, 눅 1:17).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서 믿음으로 하늘을 향해 사는 자에게 필요한 것과 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할 것은 기도를 통한 영감이요, 이는 땅이 아닌 하늘에서 임하는 지혜와 힘이다.


5. 나가는 글

야고보서의 구약해석과 권면 메시지를 재고찰해 보았다. 고찰해본 결과, 본고의 주제를 믿는 자의 삶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본 서신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서 이미 하늘에 속한 자이지만, 여전히 이 땅에 살면서 육체를 따라오는 세상의 지혜로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의 재림을 고대하는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는 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영혼에 있는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행함이다. 믿음과 순종은 굳이 분리되고 이원화 되지 않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신앙과 삶의 조화를 강력하게 부르짖으며 하늘을 향해 가는 신령한 삶을 추구한다. 예수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보셨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자들이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일 때 주께서 이를 보시고 이적을 베푸셨다(마 9:2). 기독교 신앙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명상이 아니라,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영혼이 부활할 때 새 몸을 입는 실제상황이다. 교리로 정해놓은 믿음에 관한 이론과 부딪히는 것으로 보이는 도전적인 야고보서의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역사하는 믿음에 담력을 주는 말씀이 됨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실천해야 할 기본은 사랑의 실천이다. 이는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요, 계명으로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영혼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믿는 자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자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은 자는 그 사랑을 나타내게 되며, 악한 자에게 속한 자는 무관심하여 살인하게 된다.
사랑이 믿음에 따르는 행위라면, 믿음의 수준을 유지하고 하늘을 향해 사는 신령한 삶을 위한 비밀이 있다. 진정 신령한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의 권면을 기독교 윤리나 도덕적 지침서로 보는 것은 이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되 겸손하며 인내하며 기도하여 영감이 충만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질그릇에 보화를 담은 믿음의 사람은 자기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산다.
야고보서가 구약에 관한 구체적 배경과 그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은 야고보가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그가 인용한 구약의 인물과 그에 따른 메시지는 이 땅에서 주의 재림을 고대하는 인간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성령으로 기록된 야고보서의 권면은 믿음의 사람을 향해 무게 있게 자기 소리를 내고 있다.






1) 야고보서를 어떻게 구조화 할 것이냐는 오랜 논의의 대상이었다. 디벨리우스(M. Dibelius)와 같이 불연속적인 권면의 집합체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잘 짜여진 구조의 서신서로 보는 입장도 있다. 아직도 결론이 명확하지 않은 이 문제는 야고보서를 인위적으로 하나의 주제에 따라 연결하는 것의 무리함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의 내적 연결고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주제의 연관성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K.A. Richardson, James,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 36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7), 25-26.
2)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같은 복음적 케리그마(Kerygma)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사용된 예화도 복음서의 그것들과 다르며, 도리어 구약의 인물들을 제시하는 경향을 보여 구약과 밀접한 관련성을 드러낸다.
3) 인죄론(hamartio-anthropology)에 따르면, 인간은 선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율적 인간론(autonomical-anthropology)은 인간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 안진호, 『예수와 신약』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6), 196.
4)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에서도 인간행위에 있어서 이원론적 틀을 적용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은 두 우주적 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통치를 받는다고 보는 것이다. “내 자녀들아 두 영 곧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이 인간에게 기회를 엿보고 있음을 알라. 사람의 양심은 그 원하는 대로 그 두 사이에 있다.” 유다 유언서 20.1~2; “의의 모든 자녀들은 빛들의 왕자의 장중의 지배 아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빛의 길들로 다닌다. 불의의 자녀들은 어둠의 사자의 장중의 지배 아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둠의 길로 다닌다.” 1QS 3.20~21. 안진호, 『예수와 신약』, 197.
5) 위로부터 난 지혜에 대하여 로(Laws), 아담슨(Adamson), 존슨(Johnson)과 같은 학자들은 예수와 성령으로 이해하고, 월(Wall)과 같이 모세의 율법으로 보는 자도 있다. 이 지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18, 벧전 1:23). 야고보서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으며 아래로부터 난 지혜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야고보서에 나타난 지혜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라. J.A. Kirk, “The Meaning of Wisdom in James,” NT 16 (1969/1970), 24-38.
6)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 14:4) 함과 같다. 부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가 그에게 붙은 자로서 나중이 된다(고전 15:20-23). 성도는 구원에 있어 구약의 이스라엘이 예표 했던 첫 열매다.
7) 이를 통해 볼 때, 요한은 거듭남을 이 땅이 아닌 하늘로서 나는 것으로 분리했고, 그것이 철저히 영혼의 일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이나 노력과는 무관한 것이며, 그 소속이 하늘을 향해 있는 전혀 다른 태어남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베드로는 인간이 이 땅에 이미 한 번 태어났는데 이제 다시 태어났다는 인간의 경험을 고려했고, 이로 인해 변화가 따름을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볼 때, 야고보서의 거듭남에 관한 이해는 요한과 베드로서 말씀의 모든 측면을 담고 있으며 그 맥을 같이 한다.
8) 물론 두 본문에서 사용된 동사는 원형이 같지만 사용된 시제의 차이를 통해서도 그 내용의 다름을 구분할 수 있다. 야고보서 1:15의 죄가 사망을 낳는다고 할 때는 ‘아포퀴에이’()서 현재형을 썼고, 1:18의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고 할 때는 ‘아페퀴에센’()으로 부정과거형을 사용했다. 우리의 거듭남은 단회적 사건으로 완료되었다면, 욕심은 육이 있는 동안 계속되고 진행되고 있다 하겠다.
9) 학자들 간에 이 ‘진리의 말씀’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극단적으로 이를 구약의 범주에 갇힌 상태로 이해하여 토라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라는 말씀과 같이, 토라 자체가 영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는 ‘사랑의 율법,’ ‘모세법의 내면화, 집중화, 강화’ 등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안진호, 『예수와 신약』, 201-3. 그러나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의의 법이 있어도 인간이 구원에 이르고 거듭날 수 없었음은 율법의 모든 사항을 지키고 그 앞에 의인으로 발견될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이에 야고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분명히 했다(2:10).
10) 야고보서에 의하면 구원은 이미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시점에서 이루어졌다(1:18). 그러나 계속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1:21).
11) 어떤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야고보는 율법주의자가 아니었다. 바울과 야고보는 주 안에서 네 차례 정도의 만남을 가졌는데(갈 1:18-20, 행 11:21-30; 15:6-29; 22:17-23), 바울은 부조를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인 야고보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출했고, 야고보는 이를 수용했다. 특히, 구원에 있어 이방인이 준수해야 할 율법 문제를 다룬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 받지 않고 이방인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선언한 사람도 야고보였다(행 15:13-21).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 『야고보서·벧전후·유다』, 두란노 HOW 주석 48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07), 17.
12) 아이히홀츠(G. Eichholz)를 따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야고보가 신앙을 개념화하고 이론화하는 것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믿음을 삶과 연결시킬 것을 촉구하고, 지성에 머물러 있는 말 뿐인 믿음의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다고 본다. G. Eichholz, “Glaube und Werke bei Paulus und Jakobus,” NF 88 (1961), 35-43.
13) 학자들은 이 자유가 메시아의 해방시키시는 사역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메시아 상은 중간기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Q13에서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인을 벨리알로부터 해방시킨다. 고대 유대인들은 사탄으로부터 해방된 치료와 평화의 희년 곧 새로운 메시아의 시대를 꿈꾸었다(Jubilees 23.29; 50.5; 1.29; 1QS 10.9; 4.6,7). 안진호, 『예수와 신약』, 210에서 재인용.
14) 야고보서 내에서 믿음과 행위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학자들 중에는 아예 믿음과 행위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둘 중 하나의 입장에 서는데, 믿음이 행위에 종속된다고 보는 견해와 믿음이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견해로 나뉜다. J. Lodge, “James and Paul at Cross Purpose? James 2:22,” Biblica 62 (1981), 195-213.
15) 아담슨(J.B. Adamson)은 야고보서를 통해 현대교회가 직면한 윤리적, 사회적 차원을 다루었다. 그는 구제라는 행위만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선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임을 지적했다. J.B. Adamson, James: The Man and His Message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89), 266-307.
16) 김기동은 신앙생활의 영적 측면과 생활의 측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에 대해서 강조한다. 믿음을 가지는 주체로서의 영은 이성이나 육체보다 더 중요하다. 믿음은 일반적인 종교심으로 육체와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삶 즉 영적 생활을 하는 것이다. 영혼을 위한 생활을 한다. 이렇게 볼 때, 믿음과 행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김기동, 『신령한 영적 생활』 (서울: 베뢰아, 1998), 127.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신 대목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이제 아노라’고 말씀하신다(창 22:12). 이때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이성으로 아는 것 뿐 아니라 체험하여 아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모두 포함하는 단어다.
18) 야고보서 2:21에서 이삭을 제단에 드렸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 ‘아네넹카스’()는 이미 완료된 사건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형태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심을 따라 이미 이삭을 바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 ‘하나님의 벗’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필로스 데우’()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친구를 말한다. 이러한 특별한 호칭은 구약에서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이 주어질 때, 그를 ‘하나님의 벗’으로 칭한 두 본문을 발견할 수 있는데(대하 20:7, 사 41:8), 모두 원문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되어 있다.
20) ‘함께 일하다’에 해당하는 ‘쉰네르게이’()는 미완료 형태로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처음 믿음을 가질 때 그 한계를 깨달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계속해서 맺어가는 열매로서의 행함이 함께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1) 히브리서 기자 역시 라합을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세운다(히 11:31). 라합은 이방인으로서 예수의 족보에 들게 되는데, 그녀는 살몬의 아내요 보아스의 어머니다(마 1:5). 랍비 전승에 의하면 라합의 후손 가운데 예언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예레미야도 그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김명수, 『야고보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181.
22) 8절의 ‘모든 일에’의 원문 ‘엔 파사이스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투’()는 ‘그의 모든 길’로 직역되며, 11절의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의 원문 ‘엔 타이스 포레이아이스 아우투 마란데세타이’()는 ‘그 여행길에서 그(부자) 자신도 죽게 될 것이다’로 직역된다.
23) 타메즈(E. Tamez)와 같이 본문을 해방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경우, 빈부의 차이가 계급으로 형성되고 그것에 대한 지탄으로 본문을 이해한다. 따라서 1:2, 12의 ‘시험’은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행하는 경제적 핍박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안진호, 『예수와 신약』, 198.
24) 리차드슨(K.A. Richardson)은 야고보가 복잡한 레위기의 법조항이나 정결법, 정치적 규례들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사랑이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Richardson, James, 119.
25) 김명수, 『야고보서』, 286.
26) 동생을 살인한 가인은 그 아우를 향한 무관심을 표명했다(창 4:9, 요일 3:12).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모든 것을 다하는 것으로, 무관심한 것은 살인과 같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계명은 첫 언약의 것보다 더욱 강력하며 본질적인 것으로 실상을 말하고 있다. 김기동, “처음부터 들은 소식 (요일 3:8-12),” 생수의 강 (주일신문 제 837호), 6.
27) 한편, 리차드슨(K.A. Richardson)은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을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삶에 관한 교훈이라고 보면서 그 가르침의 목적이 격려와 공동체의 연합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신자 각 개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Richardson, James, 217.
28) 사회학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본문의 해석은 가난한 자들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높은 자아상(2:5)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점을 각인시키고(3:9), 부자들의 영광의 덧없음(1:9-10; 4:14)을 고하고, 하나님이 착취하는 부자들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신다는(5:1-5) 역전의 주제(reversal theme)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안진호, 『예수와 신약』, 229. 이와 관련된 기독교 윤리에 관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하라. Wayne A. Meeks, The Origin of Christian Morality: The First Two Centurie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3).
29) L.T. Johnson, The Letter of James (New York: Doubleday, 1995), 306-7; 안진호, 『예수와 신약』, 229에서 재인용.
30) ‘자랑하다’를 뜻하는 ‘알라조네이아’()는 그 자체가 자만하고 교만한 것을 뜻한다.
31) 본문에 사용된 인내를 가리키는 단어는 ‘마크로튀미아’()다. 이는 대처하지 못하여 단지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인내가 아니라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결단으로서의 인내를 가리킨다고 해석된다. 김명수, 『야고보서』, 295-6.
32) 다른 한편으로 심판자의 도래와 인내의 관계는 성도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은 끊임없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끝나서 안식하는 것이 이 땅이 아님을 말해준다.
33) 일반적으로 욥은 인내의 인물로서 연구되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H. Fine, “The Tradition of a Patient Job,” JBL 74(1955), 28-32; D.H. Grad, “The Concept of Job’s Character according to the Greek Translator of the Hebrew Text,” JBL 72 (1953), 182-6.
34) 본문비평상 본문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본문이다. 많은 다른 사본에서는 ‘그를 향해, 그에게’에 해당하는 ‘로’() 대신 동음이의어인 ‘아니다’를 의미하는 ‘로’()가 들어간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겠다’가 된다. 그러나 신약의 증거는 욥을 인내의 사람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을 배제시키고자 한다.
35) 엘리야는 특별히 취급되는 선지자의 대표로서 신구약 중간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메시야시대를 여는 인물로서 대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서 변형되신 산에서 함께 한 두 사람 중 하나다. 리차드슨(K.A. Richardson)은 야고보가 엘리야를 언급한 것이 그의 놀라운 신유의 능력도 한몫한다고 본다. 그러나 엘리야는 신유를 나타내는 선지자로서 국한되기 보다는 도리어 기도의 능력, 영감의 사람으로 제시된 모델로 보아야 할 것이다. Richardson, James, 239.
36) 엘리야의 기도에 관한 김기동의 설명은 그 영적인 능력의 현장을 잘 표현해준다. “엘리야의 기도는 참으로 힘을 다한 기도였다. 구름은 끌려 왔고 마침내 구름 속에 담겨 있던 비를 땅에 쏟아 놓게 하고야 말았다. … 구름 속에 담긴 비를 구하는 농부같이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구하고 또 그렇게 경험해야 한다.” 김기동, 『영원한 관계』 (서울: 베뢰아, 1998), 71-72.
37) 김기동, 『믿음의 원리 10단계』 (서울: 베뢰아, 198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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