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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이 본 에베소서의 4대 주제 기획특집
 
김창주

1. 들어가는 글

김기동에게 있어서 성경 해석의 열쇠는 하나님의 의도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집약되며,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나타내셨다. 그는 에베소서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실천적 측면에서 에베소서에 접근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의 그의 저서와 설교를 중심으로 시무언의 에베소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에베소서를 주 텍스트로 한 그의 저서와 설교는 각각 1장은 약 6회, 2장은 약 10회, 4장은 약 4회, 5장은 약 9회, 6장은 약 19회 정도 다루었다. 그 중 1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복에 대하여, 2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4장은 성령에 대하여, 5장은 성령충만, 세월을 아낄 것, 부부관계를 골고루 다루었으며, 6장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약 13회), 마귀와의 영적 싸움(약 6회)을 다루었다. 3장은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다룬 내용들을 다시 주제별로 분류하면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복에 대한 이해, 교회에 대한 이해, 영적 싸움에 대한 이해, 사랑과 순종의 비밀에 대한 이해다. 이 내용들은 하나님 앞에 교회(성도)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측면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마땅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려야 하고,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아래에서는 교회의 실천적 측면들을 견지하면서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에베소서에 대한 김기동의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신령한 복

김기동의 설교에서 복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목적이 복을 받는 데 있다고까지 강조하여 종종 기복신앙을 가진 자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복은 일반인들이 사모하는 것과 같은 육체에 속한 한시적인 복이 아니라 내세까지 연결되는 영원한 복이다.1) 그 복은 영혼의 구원과 영생을 비롯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총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시요 인간은 그 피조물이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히 7:7)고 한 것처럼,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할 존재다. 그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삼위 하나님 중 성부 하나님만이 복을 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아들도 기도하시고 성령도 기도하시나 오직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아버지임을 늘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성령은 성도를 위하여 복을 비는 자이고 아버지 하나님만 직접 복을 주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그는 복을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신구약의 복이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닌 비유와 실상의 관계로 설명된다. 그는 구약교인들이 받은 육체적 복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장차 신약교인들이 받을 신령하고 영원한 복에 대한 비유로 보여주신 것임을 지적하면서 신약교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신령한 복을 누려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2.1. 신약 교회에 주신 복

김기동은 구약과 신약의 복을 구분한다. 그러나 양자는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복에서 완전한 복으로, 한시적 복에서 영원한 복으로서의 점진적 계시의 측면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율법을 순종하는 구약 교회에 복을 주셨다. 구약 때는 건강과 장수, 부와 권력, 육신의 형통함같이 육체에 속한 복이 계시되었고 또 이를 추구했다. 구약 때는 인간의 영혼이 아직 마귀의 종노릇하던 때이므로, 영혼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담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육체에 속한 복을 약속하시고 이루어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산 자들의 영혼에 주어지는 신령한 복을 사모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구약의 복은 유한한 육체에 주신 것이므로 복 자체도 유한하다. 구약시대에 육체에 부어주신 복은 영혼에 부어주시는 신령한 복에 대한 그림자요 비유다.2) 구약 사람들은 육신이 형통한 복을 받은 것일 뿐 영적인 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적인 복, 영적 권리를 허락받은 일이 없다. 그들의 신분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종이다.3)
그에게 있어 신약에 계시된 복은 영적이다. 따라서 그 복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그 복을 소유할 권리가 없으면 결코 소유할 수 없다. 마태복음 5장에 제시된 팔복은 모두 영적인 복이다. 이것이 에베소서에는 신령한 복으로 제시된다. ‘신령하다.’는 말은 ‘영적이다.’ 하는 말과 같은 뜻으로, ‘신령한 복’이란 ‘영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약시대에 와서 복은 영적인 개념으로 바뀐다.4) 신약의 복은 영원한 속성을 지닌 영혼에 주어지는 것이므로 복 자체도 영원하다. 영혼에 주어지는 구원이 그러하며, 구원받은 자가 받을 부활과 영생이 그러하다.
신약 교회의 성도는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다. 신약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다. 이는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복이다.5)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셨다(엡 1:3). 에베소서에서의 복은 신령한 복이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며, 이는 한 마디로 영혼의 구원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복은 영혼에 주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 신령한 복은 예수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으로 구약교인들은 신령한 복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 복은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심령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 신령한 복을 인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엡 1:13).
김기동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에베소서 1장 10절 말씀을 들어 복 있는 자의 수고와 노력이 하늘에서의 면류관과 상급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6) 그러니까 그는 복에 대한 개념을 육체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그리고 땅에서 주어지는 것에서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심화한다. 이는 서로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연속된 관계다. 이 세상에서 받는 핍박이 하늘의 면류관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교회에서 주어진 각각의 직분에 충성한 것이 하늘에서 상급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복은 영혼에 주어지는 것이므로 내세에 영혼에 주어지는 영광이 그가 복받은 증거가 될 것이다.7)

2.2. 예수 이름 안에서 주어지는 복

김기동 신학은 ‘신명(神名) 신학’, ‘하나님의 이름 신학’이라 불릴 만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복과 관련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예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8)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되 자기 이름을 두고 맹세하셨다. 이것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이다. 예수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주는 인감도장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이름을 믿고 그 약속을 가진 자들을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엡 1:13, 고후 1:22). 이 약속을 의심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자가 마귀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 : 교회

3.1. 작정과 약속에 대한 이해

에베소서 1장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3절)라는 말씀과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라는 말씀에 근거해 예정론자들은 인간 구원에 대한 예정을 주장한다. 즉 창세 전에,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동의 이해는 다르다. 그는 인간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예정론자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작정’과 ‘약속’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할 때 인간의 구원 문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작정과 약속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9)
먼저, 작정은 하나님이 영원전에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홀로 세우신 영원한 계획을 가리킨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그를 후사로 세우시고 그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하늘을 지으셨다(히 1:2). 아들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낮추어 죽음과 부활을 거쳐 하늘을 상속하시기로 작정하셨고(빌 2:6-8),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기쁘게 여기시고 ‘죽음과 부활’을 아들에게 계명으로 주셨다(요 10:17, 18). 아버지의 계명에 따라 죽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는 그분 아들의 행로가 작정된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원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작정이다.
반면에 약속은 인간을 대상으로 인간과의 교섭이 있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구원은 인간을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기보다는 약속에 속한 것이다. 인간 구원을 위한 첫 언약이나 새 언약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약속’이지 하나님의 ‘작정’은 아니다.
인간의 구원은 결코 영원전부터 작정된 것이 아니다. 인자 되신 예수의 죽음은 영원전부터 작정된 것이지만 그의 구원 사역은 인간의 타락한 이후에 계획된 것이다. 영원전에 작정된 예수의 죽음은 피흘림이나 고난과 무관한 죽음이었으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기에 피흘리고 고난받는 죽음이 된 것이다.10)
만일 구원이 약속이 아니고 작정이라면 구원받기 위한 믿음도 전도도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무조건 구원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의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의 발현인 ‘믿음’이 중요다. 그래서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하는 선택의 의지가 구원에 있어 절대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했는데, 이는 영원전 하나님의 작정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신 말씀은 아버지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자 죽음을 맛보려 했던 영원전의 작정을 다 이루었다는 기쁨의 탄성이다.
인간 구원이 영원전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었다면 모든 인간이 100%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지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가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승천하여 아버지께 가신 후부터 비로소 처소를 준비하신다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의 하늘 보좌 상속은 영원전 하나님의 작정이었기 때문에 이미 하늘이 예비되어 있었으나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파생된 인간을 향한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거할 처소는 승천 후부터 준비하시는 것이다.11) 그리고 그 처소는 예수 안에서의 구원에 관한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하여 지어져 가는 것이므로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3.2.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 : 교회

예정론자들은 인간 구원을 영원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자라는 ‘택함’의 교리로 연결된다. 이에 대해 김기동은 예정론자들이 ‘에클레시아’라는 교회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본다. 본래 에클레시아는 ‘불러서 모아 택했다.’는 의미인데, 예정론자들은 이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택하여 불러서 모았다.’고 본다는 것이다. 김기동은 택함은 구원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직분과 관계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12)
하나님은 지음받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아담 한 사람만을 택하여 생령이 되게 하셨고,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만을 택하셨다. 이것은 피조물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특별히 택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 한하여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에베소서 1장에는 구원받기 위한 전제 조건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3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했고, 4절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고, 5절에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라고 했고, 6절에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이 바로 예정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신령한 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13) 구원받을 자를 개별적으로 택하신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만 택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의 택함은 가능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택함’이라는 말은 직분과 관련해서 사용해야 한다. 예수께서 12제자와 70인의 제자를 택하신 것, 교회의 목사와 집사를 세우시는 것이 택함의 대표적인 예다. 가룟 유다가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택함받았으나 그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것은 택함이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증거해 준다.
또한 구원과 관련하여 흔히 오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여 아들까지도 희생하셨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인간 구원이 아들의 성육신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에 대해 김기동은 인본주의적 성경해석이라고 비판하면서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신본주의적 성경해석을 지향한다.14)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영원전 그의 권세로 작정된 일방적인 행로일 뿐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한 희생이나 봉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에서 쓰임받은 인간에게 예수의 공로가 은혜가 되게 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김기동은 아들의 성육신을 오직 인간 구원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의 부족 내지는 오해로 인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는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만 그 대부분이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들에 의해 증거되고 기록된 것이며, 하나님은 오직 아들을 향해서만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상기시킨다.15)
성경에 하나님이 아들을 향해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한 곳은 2곳이다. 예수께서 침례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하셨고, 변형산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뿐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사 그를 후사로 세우시고 그를 위하여 하늘을 지으셨고, 또한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아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요한일서 5장 12절은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여 인간의 구원이 오직 아들과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신령한 복을 주시되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주셨다고 했고, 골로새서 1장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15절)고 했다. 이로 보건대 인간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 한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16)

3.3. 복의 근원인 교회

김기동은 교회가 복의 근원임을 강조한다.17)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약속하신 말씀, 곧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하는 말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위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복을 비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하셨다. 또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하셨다(시 122:6). 이와 같이 하나님은 복의 근원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신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의 근원이다.18) 하나님이 그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산 무리들인 교회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교회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주님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이 신령한 복을 지키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교회를 축복하고 힘써 봉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한시적인 세상의 명예직을 사모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맡기신 집사의 직분, 구역장의 직분을 더 사모하고 힘써 충성해야 한다. 이처럼 영원한 직분, 영원한 것에 충성하는 것이 복을 지키는 방법이다. 겸손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잘 관리해야 한다.19)


4. 영적 싸움

4.1. 마귀의 조직

김기동은 영적 지식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마귀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를 촉구한다.20)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영적 지식이 있으나 성도의 영적 원수인 마귀와 그 조직에 대해서는 무지함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혼탁한 영계에 대한 바른 이해임을 주지시킨다.
예수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 12:26)라고 하여 ‘저의 나라’라고 표현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의 회”(2:9)라고 표현했다. 이는 사단의 왕국이 얕볼 수 없을 만큼 매우 조직적이고 거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는 사단의 조직이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주관자와 하늘의 악령들’(6:12)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동은 그의 저서 『마귀란?』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난 사단의 조직을 세분화하여 각각을 설명한다.21) 그에 의하면 정사는 이념과 헌법을, 권세는 정권자와 교권자를, 어둠의 주관자는 우상숭배와 거짓선지자들을, 하늘의 악령들이란 미혹의 영들과 귀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것을 ‘적그리스도의 영’과 ‘거짓 선지자의 영’(이단의 영)으로 분류한다.
그는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간다.22) 공산주의와 같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나라는 정사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병과 가난과 여러 가지 고통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에 의한 것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는 철학이나 과학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미혹의 영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의 동정녀 수태를 부인하거나 예수의 죽음의 공로를 부인하는 등 적그리스도적인 주장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본다.
정사는 박해를 가하고 권세는 부분적으로 핍박하며 어둠의 주관자는 사람을 우매하게 만들고 하늘의 악령들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다. 성도는 이러한 거대한 사단의 왕국의 조직을 잘 이해하고 대처해야 한다.

4.2. 심판받은 마귀

에베소서 2장은 김기동의 마귀론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본문이다.23) 영계 하늘에서 쫓겨내려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인 마귀가 실존임을 보여주는 증거 본문이면서 동시에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는 아담을 꾀어 그를 타락시킴으로써 아담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세를 빼앗아 세상 임금이 되었다(창 3:14, 요 12:31). 이때부터 인간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에베소서 2장 1-3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는 말씀은 마귀에게 속해 있던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준다. 영은 죽어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이 세상의 풍습을 좇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러나 마귀는 이제 더 이상 세상 임금도 아니요 권세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의 사망 권세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예수는 살 권세로 다시 살아나시어 마귀를 심판하셨다. 요한복음 16장 11절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하여 마귀가 이미 심판받았음을 말씀한다. 마귀의 사망 권세가 깨어짐으로써 인간은 마귀의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났다. 에베소서 2장 4절 이하는 인간이 마귀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4.3. 승리가 보장된 영적 싸움

마귀는 이미 심판받았는데, 왜 성도들에게는 여전히 고통이 따르는가? 성도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마귀와 그 부하들 때문이다. 마귀는 이미 심판받았으나 아직 형벌을 받지 않은 상태다. 그 때문에 마귀는 자기의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성도들을 미혹하고자 밤낮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다(계 12:12, 약 5:8). 이처럼 마지막 때까지 온갖 발악을 하는 마귀의 세력과 성도간의 갈등을 성경은 영적 싸움으로 묘사한다.
김기동은 모든 전쟁의 배후에 천사들이 있음을 주목한다.24) 과거에 있었던 전쟁도 현재의 전쟁도, 그리고 마지막 때 있을 전쟁도 모두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나라와 나라끼리 싸우는 세계 대전은 물론이고, 이웃간의 싸움이나 가족간의 불화, 그리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까지 모든 것의 배후에 영적 존재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처럼 김기동에게 있어서 성도의 싸움은 모두 ‘영적 싸움’으로 귀결되며, 그 싸움은 성도에게 승리가 보장된 싸움으로 이해된다.25) 그는 성도의 신앙생활 자체가 영적 생활이고, 영적 생활은 곧 영적 투쟁임을 강조한다. 그는 성도의 영적 투쟁에 있어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대상을 제시한다. 마귀(계 12:8-9)와 귀신들(막 16:17)과 미혹의 영들(살후 2:11-12)이 그것이다.26)
인간의 영적 투쟁은 창세기에 이미 선언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꾀어 범죄케 한 마귀를 향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했다. 이 예언대로 사단은 예수의 양손과 양발을 찔러 죽이는 일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셨다. 인간의 역사가 마귀와의 끝없는 영적 투쟁의 역사이지만 신약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 예수에 의해 그 권세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마귀는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머리를 깨뜨린 승리하신 예수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27)
에베소서 1장 22-23절에 “교회는 예수의 몸이요 예수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고, 5장 23절에는 “예수는 교회의 머리요 그 몸의 구주시라.”고 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예수의 권세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이기는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다.28) 요한계시록은 영적 싸움에서 끝까지 이긴 자에게 약속된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계 2:1-3:22)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다. 예수는 교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주셨고, 성도는 그러한 권세를 지닌 교회의 지체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싸움에서 이기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싸움에 나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주어진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옮길 때 이길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네 손에 붙였다’는 약속을 믿고 힘써 싸웠을 때 마침내 승리를 얻었다. 또한 ‘네가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은 자들도 각각 행동함으로 고침을 받았다. 이처럼 승리는 행동하는 믿음 속에서 역사한다.29) 그런데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혹 안다 할지라도 질병이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김기동은 이러한 현상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영적 원수인 마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30)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많은 이론과 높은 지식으로 가득차 있다. 김기동은 이러한 혼탁한 영계를 바르게 분별할 것과 영적 원수인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을 것’(엡 6:10-12)을 강력히 권고한다. 고린도후서 10장 4-5절에는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마귀에 의해 조장되는 모든 이론과 주장을 대적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성령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김기동은 ‘이기는 싸움’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6장에 3번이나 등장하는 ‘능히’라는 말에 주목한다.3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1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16절).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권능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1:8)라고 하신 것처럼, 성령을 충만히 받아 권능이 있어야 한다.

4.4. 승리의 근거인 예수 이름

김기동에게 있어 ‘전신 갑주’는 ‘예수’ 이름으로 재해석된다.32) 에베소서 6장은 영적 싸움을 말하면서 전신 갑주, 곧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완전 무장해야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김기동은 이 모든 것을 ‘예수’ 이름 하나로 대체한다. 이는 ‘예수로 옷 입으라’(롬 13:14)는 말이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이름을 소유하라는 의미다. 예수 이름 안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친히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신 분이요 모든 저주와 질병을 정복하신 분이다. 사망도 그를 삼키지 못하여 죽음에서 그를 내어주었다. 죽음에서 부활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믿는 자에게 주신 마지막 유산이 예수 이름이다. 예수 이름은 성령으로 믿는 자들 속에 거하며, 성령을 모신 자는 그 이름을 소유한 자다. 예수가 아버지가 주신 그 이름으로 세상에서 공생애의 삶을 사신 것처럼, 성도도 또한 예수 이름으로 제2의 공생애를 감당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이름으로 승리하신 것처럼, 예수 이름을 소유한 모든 자는 약속된 승리의 전쟁을 펼치는 것이다.
이미 이긴 싸움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그리고 영적 원수인 마귀를 더욱 효과적으로 격파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이 뒤따라야 한다. 권능을 소유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도다.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말씀 뒤에 ‘성령 안에서의 기도와 간구’를 당부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5. 사랑과 순종의 비밀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교회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말해준다. 5-6장에는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김기동은 가정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형상화시킨 것으로,33)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있는 거룩한 공간으로 이해한다.
김기동이 주창한 하나님의 의도는 사랑과 순종의 비밀이다.34) 그는 하나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화평에 ‘사랑과 순종의 질서’가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35) 그리고 인간이 이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정이라는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를 통해 극진히 섬겨야 할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하고, 육신의 남편을 통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순종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부모 공경을 십계명에 포함시켜 대인적 계명의 으뜸으로 삼으신 것은 그러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힘써 섬기는 순종의 도를 가정을 통해 배우고 실천하도록 하신 것이다.

5.1. 아버지께 순종해야 할 자녀

김기동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이루어진 가정에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에베소서의 부모와 자녀 관계는 윤리와 도덕적 훈계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김기동은 부모 공경을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에 대한 비유요 그림자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육신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국한시키지 않고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과 자녀된 성도의 관계로 확장시켜 탄력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36)
그런 의미에서 김기동은 세상에 주신 가정을 하나님의 가정의 모형으로 이해한다.37) 하나님의 가정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녹아있는 가정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후사로 세우시고 그를 위해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히 1:2)과 아버지 앞에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의 순종(빌 2:6-8)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가정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그러하며,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러하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비유이며 모형이다.38) 육체의 예법인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 영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비유였던 것처럼, 육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영의 아버지를 섬기는 것에 대한 비유요 그림자로써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육신의 부모를 섬기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육신의 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자가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는 의미다.39)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는 말씀처럼, 육신의 부모를 어떻게 섬기는가를 보고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를 판단하신다는 것이다.40) ‘부모 공경’을 십계명 가운데 사람을 위한 계명 중 첫 번째 것으로 계시하시고,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는 육신에 속한 복을 약속하셨으니, 이는 영원한 신령한 복에 대한 비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 공경’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땅에 속한 복을 받은 자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약속 있는 계명을 지키는 자다. 가정은 거룩한 부자 관계를 현실로 보는 증거이며 아버지께 순종한 자만 아버지의 집에 거한다(요 14:2).41)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가정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육신의 부모도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처럼 자녀된 자는 육신의 부모에게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 이로써 영과 육, 곧 하늘의 생활과 땅의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 ‘영원한 가정’, ‘영원한 집’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교리적, 관념적 관계가 아니라 체험적 관계다.42)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약 1:18)고 한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참 아버지이시며 성도는 하나님의 참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하며, 이것이 육신의 부모를 향해서도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43)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통해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고 구원받은 영혼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엡 1:13; 4:30).

5.2.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할 교회

그리스도와 교회도 사랑과 순종의 관계다. 에베소서 5장 22-28절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생겨난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한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요 온전한 한 몸이다. 이처럼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하나요 둘이 합하여 온전한 한 몸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21장 9절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라고 함으로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온 몸이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듯이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움직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신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오신 이시요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순종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순종함이요 그리스도를 섬김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것처럼, 교회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핍박과 모진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앞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교회 앞에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라도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마땅한 의무요 교회의 지체된 성도의 본분이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의 역할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교회의 모습을,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의 역할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정이라는 제도를 주신 것은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의도를 더듬어 알게 하시고, 이로써 그리스도께 죽기까지 복종해야 하는 교회의 본분을 다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6. 나가는 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기동은 예수 안에서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실천적 측면에서 에베소서를 접근한다. 먼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신령한 복,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는 교회를 이루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하며, 교회에 맡기신 영적 싸움을 감당해야 함을 피력한다. 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영적 원수인 마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해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가정의 부자관계, 부부관계를 통해 계시되었음을 밝힌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육신의 부모를 두심으로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섬기는 도를 배우게 하시고 이를 몸소 실천하게 하셨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셨다. 이로써 아들이 아버지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것처럼 성도가 마땅히 하나님을 순종하고 섬길 것과 몸인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죽기까지 순종해야 함을 보여주셨다.
요약컨대 김기동은 에베소서에서 사랑과 순종의 비밀이 담긴 교회와 가정을 통해 성도의 나아갈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준다.














1) 김기동, “신령한 복”, 2000년 9월 10일 주일설교.
2) Ibid.,
3) 김기동, “신령하고 행복한 가정”, 2001년 7월 30일. 여름수련회.
4) 김기동, “신령한 복”, op. cit.,
5) 김기동, “신령하고 행복한 가정”, op. cit.,
6) 김기동, “신령한 복”, op. cit.,
7) 김기동은 복과 관련하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자기 당대의 복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듯이 자손 천대에까지 복이 이어져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8) 김기동,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上)』(서울: 도서출판베뢰아, 2001), pp. 223-25.
9) 김기동, 베뢰아아카데미 사범반 1기 강의, 제18강, 1991년 10월 7일.
10) 김기동, 베뢰아아카데미 사범반 1기 강의 제24강, 1991년 12월 2일.
11) 김기동, 베뢰아아카데미 사범반 1기 강의, 제21강, 1991년 11월 11일.
12) 김기동, 『제자를 삼으라(上)』(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6), pp. 92-97.
13) 김기동, “내 자녀는 내가 양육하자”, 1995년 5월 28일 주일설교.
14) 김기동, 베뢰아아카데미 사범반 1기 강의, 제3강, 1991년 3월 25일.
15) 김기동, “영원한 집”, 1986년 8월 17일 주일설교.
16) 김기동,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87년 8월 9일 주일설교.
17) 김기동, “하나님의 뜻을 행하자”, 2002년 5월 12일 주일설교.
18) 김기동, “교회는 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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